자살을 생각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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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크45 작성일16-07-27 12:31 조회56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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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의 중학교 성적은 거의 바닥이었고, 그나마 실업계 중에서는 명문이라는 학교를 간신히
진학하게 되었다.
허나 나는 너무 두려웠다. 학교 폭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 때, 내가 내린 결심은 단 하나였다. 말을 아예 하지 않는 그것이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믿지 못할 수도 있으나,
나는 고등학교 내내 거의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친구가 없었다. 이런 나를 무시하는 한 녀석은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날, 작정 한 듯 엎드려 있는 나의 등을 발로 무자비하게 찼다.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묵묵히 엎드려 그가 주는 폭력을 감당하고 있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이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본체만체했다. 차라리 전부 나를 비웃기라도 했다면, 그랬었다면..
최근 페이스북으로 그 친구를 찾아보았다.
그 친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벤츠차량을 몰며,
처녀와 결혼까지 했다.
잠시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면, 나에게는 오주x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친구였는데,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중학교를
함께 등하교 했다. 그는 나와 단짝친구처럼 다녔지만, 항상 나를 놀림감으로 여기고
폭력까지 일삼았다.
내가 성인이 되고 카페에서 직장생활을 했을 때,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그 친구가 카페 아르바이트생의 남자친구였던 것이다.
나는 그 친구와 연락을 했고, 그 친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와, 지금 계획, 미국까지 다녀온 이야기들을
자랑스럽게 풀었다.
그러나 난, 그에게서 중학교 시절에 나에게 폭력을 일삼았던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의 사과도 받지 못했다. 그 후 그는 내게서 의도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보자면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반이 지나고부터 3학년 때 까지 3년 내내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점심을 따로 사 먹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굶었다. 그 배고픔을 참고서라도 혼자 있고 싶었다.
다행히 학교 바로 옆은 도서관이 있었다. 나는 점심시간 내내 도서관에서 책을 보았다.
책을 제대로 보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도서관 사서는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아무말도 건네지 않았다. 내게서 슬픔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학교를 가지 않았다. 너무 두려웠다. 특히 실습시간이 너무 두려웠다.
나는 여전히 성중독을 안고 살아갔다.
나는 너무 외롭고 공허했다. 가족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날 이해하지 않았다.
나와 단 한번이라도 대화를 나누려는 시도 조차 없었다.
그들은 같은 공간 내에 살면서, 자식이라는 나에게 부모로서 그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만큼 무력했으며, 그만큼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변명이 될 순 없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느 날은 학우들과 어울리는 것이 두려워 무심코 가입했던
YMCA 활동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배들이 나를 시내 공원 지하실로 끌고가 수십대의 따귀를 때렸고,
나는 벌개진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어머니라는 사람은 그런 나를 본채 만채 했고 누군가와 심각하게 통화를 하는 중이었으며, 나에게 볶음밥을 해주고는 그대로 외출을 나갔다.
만약 그 때 당시 그들이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어떠한 행동을 해 주었더라면,
내가 학교에 빠지고 혼자 시내 공원의 오줌냄새가 나는 화장실에 오전 오후 내개 숨어 있었던 내 자신을 이해해주었더라면, 학교를 가지 않은 내게 어머니라는 사람이 전화로 쌍욕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마음이 더 편했을지 모른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4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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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중학교 성적은 거의 바닥이었고, 그나마 실업계 중에서는 명문이라는 학교를 간신히
진학하게 되었다.
허나 나는 너무 두려웠다. 학교 폭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 때, 내가 내린 결심은 단 하나였다. 말을 아예 하지 않는 그것이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믿지 못할 수도 있으나,
나는 고등학교 내내 거의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친구가 없었다. 이런 나를 무시하는 한 녀석은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날, 작정 한 듯 엎드려 있는 나의 등을 발로 무자비하게 찼다.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묵묵히 엎드려 그가 주는 폭력을 감당하고 있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이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본체만체했다. 차라리 전부 나를 비웃기라도 했다면, 그랬었다면..
최근 페이스북으로 그 친구를 찾아보았다.
그 친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벤츠차량을 몰며,
처녀와 결혼까지 했다.
잠시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면, 나에게는 오주x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친구였는데,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중학교를
함께 등하교 했다. 그는 나와 단짝친구처럼 다녔지만, 항상 나를 놀림감으로 여기고
폭력까지 일삼았다.
내가 성인이 되고 카페에서 직장생활을 했을 때,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그 친구가 카페 아르바이트생의 남자친구였던 것이다.
나는 그 친구와 연락을 했고, 그 친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와, 지금 계획, 미국까지 다녀온 이야기들을
자랑스럽게 풀었다.
그러나 난, 그에게서 중학교 시절에 나에게 폭력을 일삼았던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의 사과도 받지 못했다. 그 후 그는 내게서 의도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보자면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반이 지나고부터 3학년 때 까지 3년 내내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지 않았다.
그렇다고 점심을 따로 사 먹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굶었다. 그 배고픔을 참고서라도 혼자 있고 싶었다.
다행히 학교 바로 옆은 도서관이 있었다. 나는 점심시간 내내 도서관에서 책을 보았다.
책을 제대로 보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도서관 사서는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아무말도 건네지 않았다. 내게서 슬픔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학교를 가지 않았다. 너무 두려웠다. 특히 실습시간이 너무 두려웠다.
나는 여전히 성중독을 안고 살아갔다.
나는 너무 외롭고 공허했다. 가족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날 이해하지 않았다.
나와 단 한번이라도 대화를 나누려는 시도 조차 없었다.
그들은 같은 공간 내에 살면서, 자식이라는 나에게 부모로서 그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만큼 무력했으며, 그만큼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변명이 될 순 없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느 날은 학우들과 어울리는 것이 두려워 무심코 가입했던
YMCA 활동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배들이 나를 시내 공원 지하실로 끌고가 수십대의 따귀를 때렸고,
나는 벌개진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어머니라는 사람은 그런 나를 본채 만채 했고 누군가와 심각하게 통화를 하는 중이었으며, 나에게 볶음밥을 해주고는 그대로 외출을 나갔다.
만약 그 때 당시 그들이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어떠한 행동을 해 주었더라면,
내가 학교에 빠지고 혼자 시내 공원의 오줌냄새가 나는 화장실에 오전 오후 내개 숨어 있었던 내 자신을 이해해주었더라면, 학교를 가지 않은 내게 어머니라는 사람이 전화로 쌍욕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마음이 더 편했을지 모른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4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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