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생각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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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크45 (211.♡.158.128) 작성일16-07-27 12:12 조회5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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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터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성격도 다소 밝아지게 되었다.
분명 내 안에는 우울한 나 이면에 활발한 또다른 내가 있었다.
축구는 그것을 일깨워 주었다.
축구로 많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 나는 정말 축구를 열심히 했고, 잘 했던 것 같다.
주변 친구들에게 나는 축구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내게 치명적인 아픔은 여전히 존재했다.
부모의 갈등은 항상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회피하고자 공상에 빠졌다.
이를 테면, UFO라던지 동화책같은 소설에 집착했다.
내가 공상에 빠진 이유를 생각하면, 그랬던 것 같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그것들에 빠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나는 줄곧 학교폭력에 시달렸다.
초등학교 시절과는 달랐다.
거의 하루게 다르게 매일 아이들에게 맞는 생활에 시달렸다.
싸우는 일도 잦아 손목이 나가거나 코피가 나는 날도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부터는 도시락을 함께 먹을 친구가 없어 점심시간에 억지로 잠을 잤고,
그런 나를 주변 아이들은 비웃으며 더욱 더 폭력을 가했다.
나는 싸늘하게 식은 도시락을 집에 가져와 가족들 몰래 울면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계속 되었다.
아이들은 잠든 척 엎드려 있는 나에게 와서 등을 때리고,
일어나 있으면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따귀를 갈겼다.
몇몇 녀석들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종이를 입에 씹어 나에게 뱉거나, 내 책상을 분필로 하얗게 칠해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쉬는 시간이 너무 두려웠고, 등교하는 시간만 되면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그것들을 잊기 위해 집에 오면 컴퓨터에 집착했다.
부모는 나의 이 고통에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내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들, 특히 어머니란 사람은 늘 나에게 신경질적이었고, 나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더욱 키워나가야만 했다. 나는 진정 그녀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 어린 시절, 나는 그 감정을 애써 억눌러야만 했다. 나는 내 스스로가 정상이 아니라고만 치부했다.
모든 것이 다 내가 못나서 이 모든 감정들을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한다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나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잊기 위해 음란물에 집착했고, 자위행위에 집착했다.
마치 망망대해의 바다에서 물이 떨어져 바닷물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운명과 매우 흡사했다.
나는 자위행위가 바닷물을 마시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내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불안함을
잊기 위해 자위행위에 집착했다.
나는 몸의 성장을 그 때 쯤 완전히 멈추었고, 얼굴에는 늘 생기가 없었으며, 정신적으로 점점 피폐해져 갔다. 나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으며, 설령 간접적으로 내 고통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부모라는 존재는 그런 나를 오히려 비난했다. 그들의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못난 새끼이기 때문이었다.
3에서 계속
분명 내 안에는 우울한 나 이면에 활발한 또다른 내가 있었다.
축구는 그것을 일깨워 주었다.
축구로 많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 나는 정말 축구를 열심히 했고, 잘 했던 것 같다.
주변 친구들에게 나는 축구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내게 치명적인 아픔은 여전히 존재했다.
부모의 갈등은 항상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회피하고자 공상에 빠졌다.
이를 테면, UFO라던지 동화책같은 소설에 집착했다.
내가 공상에 빠진 이유를 생각하면, 그랬던 것 같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그것들에 빠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나는 줄곧 학교폭력에 시달렸다.
초등학교 시절과는 달랐다.
거의 하루게 다르게 매일 아이들에게 맞는 생활에 시달렸다.
싸우는 일도 잦아 손목이 나가거나 코피가 나는 날도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부터는 도시락을 함께 먹을 친구가 없어 점심시간에 억지로 잠을 잤고,
그런 나를 주변 아이들은 비웃으며 더욱 더 폭력을 가했다.
나는 싸늘하게 식은 도시락을 집에 가져와 가족들 몰래 울면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계속 되었다.
아이들은 잠든 척 엎드려 있는 나에게 와서 등을 때리고,
일어나 있으면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따귀를 갈겼다.
몇몇 녀석들이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종이를 입에 씹어 나에게 뱉거나, 내 책상을 분필로 하얗게 칠해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쉬는 시간이 너무 두려웠고, 등교하는 시간만 되면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그것들을 잊기 위해 집에 오면 컴퓨터에 집착했다.
부모는 나의 이 고통에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내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들, 특히 어머니란 사람은 늘 나에게 신경질적이었고, 나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더욱 키워나가야만 했다. 나는 진정 그녀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 어린 시절, 나는 그 감정을 애써 억눌러야만 했다. 나는 내 스스로가 정상이 아니라고만 치부했다.
모든 것이 다 내가 못나서 이 모든 감정들을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한다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나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잊기 위해 음란물에 집착했고, 자위행위에 집착했다.
마치 망망대해의 바다에서 물이 떨어져 바닷물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운명과 매우 흡사했다.
나는 자위행위가 바닷물을 마시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내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불안함을
잊기 위해 자위행위에 집착했다.
나는 몸의 성장을 그 때 쯤 완전히 멈추었고, 얼굴에는 늘 생기가 없었으며, 정신적으로 점점 피폐해져 갔다. 나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으며, 설령 간접적으로 내 고통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부모라는 존재는 그런 나를 오히려 비난했다. 그들의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못난 새끼이기 때문이었다.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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