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인터넷중독과 심리요인적 치료 중독은 어떤 것이든 심리적 결핍이 원인이지만 근본적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단순히 채워져야 할 욕구나 욕망이 문제라는 것이다. 1차적으로 사랑이라는 긍정적 에너지이고 다음으로는 욕망의 문제이지만, 더 깊은 문제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에 대한 작업은 인터넷중독자를 올바로 이해해 치료효과를 올리는데 중요하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식적 특성과 아울러 개인의 성장 과정까지도 모두 이해하는 문제이므로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서 어렵다. 여기서는 그런 한계 때문에 일단 몇몇 판별 기준을 세우고 상응하는 방법을 시도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1. 인터넷중독 원인으로서 즐거움 추구 인터넷중독은 즐거움 추구와 관련이 있을까? 일단 그렇다고 해야 한다. 즐겁지 않으면 인터넷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즐거움을 추구하는 본능은 자체가 무엇인지 매우 알기 어려운 때가 있다. 즐거움은 욕망이라는 행위로 나타나 사람들이 그 안에서 기쁨을 얻으려 하거나, 더 은밀한 형태로 평화로운 감정 속에서 즐기려 한다. 사람들에게 욕망이 결핍되거나 왜곡돼 있을 때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꾸로 그런 감정을 느낀다고 반드시 그들의 욕망이 삶의 현존을 선물로 받을 수 있도록 자신과 그들의 과거로부터 벗어났음을 보증하지도 않는다. 프로이트가 말했듯 인간의 감정은 모두 진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감정은 욕망의 원인도 아니고 대상도 아닌 사람에게 옮겨질 수 있다. 죄책감에 관한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인간 감정의 특징 중 하나인 중독에 대해 우리는 욕망의 질서 안에서 분석해야 한다. 더욱이 히스테리는 욕망과 정감의 특별한 혼란으로 인간적인 사랑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우리는 히스테리와 비슷한 증상들에 대해 살펴야 한다. 히스테리는 특별히 중독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적 욕망을 담을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히스테리는 신경증으로, 위험한 욕망을 다른 형태로 계속 이행시키려 하며, 성공시키지 못한 부분이 남은 잔여물이기 때문이다. 히스테리 환자들은 자기가 정말 요구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히스테리컬한 아내의 성적·정서적 불만 때문에 상처받은 남편이나, 병을 고치지 못한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만나는 의사에게 정서적 고통을 도와달라고 보채거나, 너무 뽐내거나 조심성 없이 행동하는 인터넷 중독자들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이런 히스테리 환자들은 종종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억지를 부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덕적인 잘못 때문에 히스테리가 생긴다고 주장하면서 전제적 의미론을 주장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히스테리 환자들로부터 사랑해 달라거나 도와달라는 요청을 집요하게 받거나, 그들의 거부, 과시, 고통이 계속해서 옮겨 다니기 때문에 결국 의기소침해져 그들의 위장(僞裝)이 너무 심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히스테리 환자들이 하는 행동이 때때로 매우 거짓처럼 나타날지라도 그들의 복잡한 과거사의 고통스러운 국면에서 끊임없이 정교하게 나오는 욕망의 기계 장치 때문임을 안다. 그러면 인터넷중독이 어떻게 히스테리와 관련되는 것일까? 이들의 히스테리에 의한 욕망의 병리는 강박신경증보다 분간하거나 분석하기 훨씬 어렵다. 강박관념은 방어 전략에 충실하면서 경직된 구조를 가지지만, 히스테리는 그와 달리 심리적으로 덜 한정돼 있고, 감정에서도 더 변화무쌍한 변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적 결핍의 히스테리는 욕망을 형성하고 유지하며, 실패하는 여러 과정들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적 불만의 히스테리에 대한 특성이 술을 마시려고 하는 행동에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가에 대해 지적하는 것으로 치료 의미를 찾아야 한다. 2. 억압이나 좌절된 욕망 인터넷중독은 억압이나 좌절된 욕망과 관련이 있다. 밤을 새워도 인터넷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들을 짓누르는 억압이나 좌절을 이기려는 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현실과 전혀 다른 이상화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실제로 인간은 그런 이상화를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 이런 이상화는 곧잘 현실과는 대조되는 개념이다. 어려운 현실을 살면서도 아름다운 꿈을 꾸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넉넉한 현실을 살면서도 아무런 이상(理想) 없이 사는 사람도 있다. 인터넷중독자를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상화를 “대상과 관계되는 과정으로, 그 속에서 대상의 본성은 변화되지 않으면서 심리적으로 확장되고 찬양되는 과정”이라 말한다. 이런 이상화는 일면 현실을 탈피하려는 성격을 가졌는데, 승화와는 조금 다르다. 승화는 성 본능에서 나왔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되게 변환시켜 성적이지 않은 목적을 향해 발전적으로 나가게 만드는 힘이다. 이처럼 억압이나 좌절된 욕망에서 인터넷중독자를 이해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대상의 특징을 찬양하지만, 히스테리 환자들의 문제는 이상화하려는 그들의 지배 욕구가 파괴되지 않을 때 생긴다. 여기서 히스테리는 자궁이라는 뜻으로 정신의학에서는 성적 욕구불만이 여성에게 정신특유의 질병이 됨을 지칭하게 됐다. 그러면 인터넷중독자들의 성적 불만족이 행동을 유발시키지는 않을지 생각해 보자. 이는 상담치료에서 곧잘 발견된다. 그들이 성적 불만족을 가질 때 더 많이 인터넷을 찾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적 측면에서 욕구불만을 느낄수록 인터넷에 매달리는 일에 더욱 고착된다. 그들은 인터넷에 매달리는 일이야말로 절대적이라 믿고, 거기에 전적으로 수고를 바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끌리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이는 그들이 히스테리컬한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실망의 수렁 속으로 들어가는 열정 때문에 관심을 기울이지, 보통 때는 무시하기 쉽다. 인터넷중독자들의 상담치료에서 그들의 히스테리컬한 연구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흠이 없고 결점이 없는 남성을 꿈꾸지만, 남성들은 언제나 거만한 듯한 외모 속에 나약함을 숨기고 있다. 남성들이 만약 겸손하게 보인다면, 방어를 위한 무기일지 모른다. 우리는 종종 능력이 있지만, 그들에게 다가오는 욕망에 원칙적으로 닫혀 있는 남성에게 히스테리 환자들이 유혹하면서 집착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의사, 목회자, 정신치료자들은 흔히 그런 대상이 된다. 그 집착은 성적 욕구불만 때문에 생겼고, 우리는 거기서 성적 욕구의 본성을 발견한다. 그들이 처한 입장은 욕망에 응답하지 못하게 하면서, 거기 머물러 그들이 흠 없는 남성이라는 멋진 모습이 파괴되지 않도록 베일에 가려 있다. 히스테리적 특성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이상화는 타자에게 욕망을 불러 일으키지만 자기를 통제하려는 의지는 타자가 흠이 없고, 그럼으로 아무 욕망도 없게 되려는 타자의 비밀스러운 희망 때문에 유지된다. 다시 말해서 히스테리 환자는 그들에게 아무 욕망도 표현할 줄 모르는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중독자가 개인적인 삶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사랑을 붙잡으려는 호기심은 어디서 오는가? 히스테리 환자는 아직 얻지 못한 그 사람과의 내밀한 삶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한다. 그러면서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해 탐색하고, 언젠가 선택받길 바라지만 버리면 어떡할까 두려워하면서 미리 실망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여성 히스테리 환자에게 욕망의 대상은 ‘이상화된 남근“이다. 그녀들에게는 오로지 성적인 관심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때 ‘남근’은 상징적인 실재이자 실제적 기호이고, 그 기관은 남성의 성기다. 이상화된 남근은 히스테리 환자들이 바라는 힘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녀들에게 완전한 즐거움을 주리라 기대되는 존재의 상상적 표상이다. 반면 남성 인터넷중독자에게 어머니는 이상화된 대상의 모습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어린 남자아이에게 비친 어머니의 위치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그를 분리시키는 금지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적 이유는 어머니를 더 이상화시킨다. 인터넷중독자들이 인터넷을 찾는 행위가 모성애를 그리워하는 행동이라면, 때때로 그들이 아내로부터 유혹을 느낄 때 두려운 성적 퇴행이 일어나고 반동에 의해 이상화를 더 발전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화를 강화시키는 상황이 어떤 것이라도 욕망의 대상에 대한 이상화는 욕망의 형성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그들이 효과적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게 만든다. 그들이 욕망을 통해 즐거움을 누리려면 이상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특이한 사실은 성적 불만의 현실이란 아무리 방어적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내면에서 꿈틀대는 초기의 애착과 금지를 유지하지만 억압에 의해 억눌려질 뿐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자유롭게 행사되지 못하면 정신적인 것, 즉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치료자가 이런 성적 욕구불만을 간과하고 그들의 문제에 대해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하거나 치료하려 한다면 모순이다. 3. 인터넷을 찾는 행동과 욕망의 상관성 인터넷을 찾는 중독자의 행동은 비단 인터넷 때문만은 아니다. 그 행위는 대체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인터넷이 즐거움의 대상을 더욱 추구하는 점에서 이해된다. 실제 그들이 특별한 대상을 선택하고 바라는 것은 특별히 선택된 대상이라는 생각을 부르고 자존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상상 속에서 자기를 확장시키는 것은 그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욕망을 펼치면서 내면에 숨기고 있는 과대망상적 요소를 품고 있다. 그것들은 그런 생각을 말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버릇이나, 특별한 자리를 찾으러 다니는 태도에서 드러나는데 그런 사람들은 일상적인 일에 종사하기를 강박적으로 거부하고 자기방어적 거짓말을 일삼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정작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때로 이런 경우 남성 중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여성을 이상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때 욕망의 대상이 되는 여성에 대한 이상화는 동정녀나 소공녀에 대한 찬양 혹은 플라토닉한 사랑의 대상이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숭배로 나아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열정을 추구한다. 성적 불만족에 대해 일어나는 욕망은 결코 만족되기 어렵다. 그것은 욕망을 위한 욕망,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적 불만족 문제는 사랑의 열정과 같이하지만, 그 열정은 자신의 미래를 파괴하고 만다. 이런 현상에는 본래 현실이 요청하기만 하면 성적 불만족 욕망은 신앙적 사랑으로 나가게 하는 절대적 열정이 내포돼 있다. 이런 이유로 중세시대 궁정의 사랑을 읊었던 수많은 시인들이 욕망에 대한 숭배를 사랑의 신비주의로 바꾸면서 수도사적 삶으로 나갔는지 모른다. 상담치료적 관찰에서 볼 때 욕망 결핍에 대한 문제는 전술한 대로 성적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아동기 자리의 표시다. 아동기 자리의 특징은 병적 허기증과 식욕부진이 교대로 나타나는 데서 보듯 섭식행위와 관계되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아동기 자리는 기본적으로 내적 공허감을 없애는 사랑의 애착 대상을 탐욕적으로 추구한다. 성적 불만족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양가성은 강박신경증 환자처럼 사랑과 미움의 양가감정이 아니라, 탐욕 때문에 어떤 대상에 집착했다가 실망과 무관심 때문에 돌아서기가 교대로 나타난다. 그것은 다른 모습으로, 어떤 것을 빨아들였다가 거부하거나, 뜨거웠다가 차가워지거나, 가득하게 찼다가 비우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확실한 것은 성적 불만족의 원천이 인터넷중독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그런 욕망이 선택할 행동은 인터넷을 찾아 자신의 허탈한 부분을 채우려는 자기애와 이상화를 거치면서 어려운 길을 나가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런 행동은 대개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상태에서 억압이 역동적으로 작용하여 만드는 성적 표상의 무의식적 고집이다. 그러니까 인터넷중독은 사랑의 욕망으로부터 나왔으며, 동시에 사랑의 욕망에 대한 방어다. 그들은 욕망의 대상을 이상화하면서 그것을 성욕으로부터 무한하게 벗어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면의 욕구를 달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 때로는 무모하거나 자의적인 듯 보일지 모른다. 욕망과 중독성 및 집착, 성적 불만과 인터넷중독 사이의 상관성은 치료자들이 그들의 내면적 의도를 정신의 지하층에서 싹트는 것과 분리시키려 하기 때문에 더 불확실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상담치료에서 선입관을 갖지 않고 그들에게서 진실하게 들은 것을 경험으로 실험해 보지 않은 치료자들에게는 그들의 증상이 아직은 환상적이라 생각될지 모른다. 그것을 너무 지엽적이라 생각하는 치료자들이 불편해하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구체적 자료가 없으면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의 내용을 의미하는 예를 충분히 제시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전문적인 일에 성공적으로 종사했던 재능있는 여성의 경우를 예로 들고자 한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우울증과 불안 때문에 인터넷에 매달리다 인터넷 중독자가 되었다. 그녀는 상담분석을 받으면서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나중에는 매 순간 놀라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서서히 알게 됐다. 그것은 그녀가 사춘기와 청소년기 동안 그리스도와 에로틱한 관계에 빠지는 환상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처음 그녀는 아직 아이였을 때, 침대에 누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가 그녀의 옆에 누워있는 상상을 했는데, 그때 그녀는 그리스도의 손을 자기 가슴에 댔다. 그때 상상은 그녀에게 아주 따뜻한 느낌을 갖게 했다. 아이들은 살아있는 사람이 왜 부재하는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부를 때 왜 대답하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에 그와 같은 ‘환상’을 가지곤 한다. 그때 아이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지금 있지 않는 사람의 음성을 듣거나 보는 등 환각 체험을 하곤 한다. 이 특별한 경우 그녀가 물리적으로 접촉했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쓰다듬어준 것이 신앙적이고 이상적으로 전환된 사실을 의미한다. 무상하게 지나가는 청소년기 상상의 그림자 속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신선하게 나타나 그의 손으로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던 것이다. 그녀가 상당히 어렵게 불러내고, 그녀의 의지를 거슬러 복원해 낸 수많은 기억들은 성적이고 신앙적인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신부로 간택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임신되어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예정되는 환상을 가졌다. 그때 그녀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적의를 느꼈음을 기억했다. 그 감정은 그 당시 그녀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완전히 잊힌 감정이지만 그것이 질투였다는 인상이 분명히 남았다. 지금 와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 감정에 대한 기억은 당시 그녀가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기억을 다시 부르면서, 실제 기억으로 그녀의 마음에 부담을 주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연상이 끼어들었고, 청소년기 환상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였다. 이어 그녀는 성기에 난 상처의 감각, 성에 대한 혐오를 다뤘으며, 그 혐오가 그녀에게 세척하는 증상을 불러일으키는 실제적인 물품으로 옮겨 그 물품이 공포의 대상임도 알게 됐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 성적이고 의식적인 마음에 매혹적인 몽상 상태에서 나타나 그녀가 거기 현존하기보다 부재한다고 해야 맞을 것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4. 인터넷을 찾는 행동과 성적 욕망의 상관성 우리는 지금 인터넷에 매달리는 행동과 성 문제를 연관시켜 이해하려 한다. 이런 일은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차치하고 치료하려는 치료자들에게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도대체 인터넷중독이 왜 성과 관련되는가? 경험 많은 치료자들은 안다. 그들의 욕구불만이 인터넷을 찾게 만들고 인터넷을 하면 그런 느낌에 보충이 되는 점은 인터넷과 포르노가 짝지어 나타나는 상징으로도 알 수 있다. 인터넷에 많이 매달리는 상태는 무의식 상태에 접한다. 그 무의식 특성 중에서는 성적 본능이 1차로 자극된다. 이런 점을 제외하고 그들의 인터넷중독을 이해하거나 치료하는 것은 “나무에서 생선을 구하는 격”이나 다름없다. 이런 문제는 성적인 불만이나 결핍을 경험하는 남성의 히스테리에서도 나타난다. 그때도 여성에 대한 이상화는 억압된 욕망의 관계를 극복하려는 무의식적 노력 때문에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언젠가 호숫가에서 보았던 매우 아름다운 소녀에 대한 기억에 매혹당했던 사람이 있다. 그에게 그녀는 완벽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의 출현 그 자체였다. 그는 그녀를 보면서 성욕은 마치 천하고 야비한 데서나 느끼는 것처럼 생각돼 도무지 성욕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둔탁하고 뿌옇게 보이는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분명하게 대조되는 어머니에 대한 찬양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고양된 가치에 정신에너지를 붓게 하는 원천이다. 이들의 욕망은 그들의 여성 관계, 특히 그들을 상담했던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신경증적이었던 관계가 그가 보였던 욕망에서 방어기능의 작용임을 알게 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있는 몸의 원리와 너무 반대되게 욕구만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이 경멸했던 성욕이나 순수한 사랑과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이 세상에 대해 반대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자, 성욕을 남성적으로 받아들였고, 여러 일탈행동을 했다. 나아가 그동안 열심히 하던 중독 생활도 모두 그만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그가 성욕을 받아들인 것은 억압을 모두 풀어버렸다는 의미인가? 또 그가 해 왔던 중독 생활은 모두 거짓이었나? 대답은 물론 첫째도 둘째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두 성향은 내면에서 정확하게 인식되지 않고 흐려져 있었다. 인터넷중독자들은 대개 강박적인 데가 있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인터넷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면의 허전함을 느낀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그런 허전함을 채우려 드는지 모른다. 이런 경우 그들의 강박성은 그들이 실현시키려는 자아 이상을 상상 속에서 한없이 높이고, 그들이 내면에 지나친 요구와 판단을 하는 사나운 초자아를 세워놓는다. 그러나 성욕이 너무 과도해 반감을 부르는 경우 단 한 가지의 정서적 느낌만이 가능한데, 그것은 몸이 흥분된 것처럼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들이 욕망하는 위엄을 지키면서 존재하도록 정당화시키는 초월적 대상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중독의 강박과 성적 불만 사이에 느끼는 방식이 다르다고 인터넷중독자들이 강박적 방어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인간적인 모습이 있어서, 불안감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시행되므로 히스테리 환자에게 강박신경증에서 나타나는 방어적 태도를 발견하거나, 강박신경증 환자에게서 히스테리적 태도가 나타날 때 놀라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은 어떤 특별한 진단이 사람들의 모든 실존에 해당된다고 보는 꽉 막힌 생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단이란 사람들 속에 지배적으로 모순된 작용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정신적 핵을 제한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5. 성욕 결핍과 중독자의 신비주의 앞에서 우리는 성욕 결핍이 인터넷에 빠져들게 한다고 했다. 비단 인터넷중독자들 뿐만 아니라 신앙인들도 이런 현상이 비정상적 신앙을 유발하는 병리학적 경우도 있다.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면을 우선해 육체적 본능을 등한시하거나 무시하는 현상을 지적하고자 의도했다. 성욕이란 누구나 해소를 목적으로 하는 충족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점은 치료시 중독자들을 깊이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성욕 결핍은 중독의 중요한 원인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인터넷에 중독된 사람이 본능에 자극돼 성을 가까이하는 행동이 나타나는 점에서 드러난다. 포르노에 중독된 사람은 일단 성욕에 자극을 받아 남성은 여성을 찾고, 여성은 남성을 찾지만 비도덕적·비윤리적 행동 때문에 수용하기 쉽지 않은 것 뿐이다. 예를 들어 남성들이 포르노에 중독돼 여성을 가까이한다고 하자. 이때 여자들은 자신을 윤락녀로 착각하느냐는 식으로 대응한다. 이 행동이 서로 존재 불신을 유발하고 존재 가치를 더 떨어뜨린다. 남성의 심리를 이해하는 여성은 이 행동을 그대로 받아주기도 한다. 이런 점이 바로 고마운 아내요 자신을 잘 이해하는 아내로 생각하게 한다. 영적인 면을 강조해 육체를 소홀히 하는 신앙인들도 별 차이가 없다. 이런 점이 부부의 불화를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독실한 여성도가 남편이 인터넷에 매달리면 자신에게 대든다는 것을 불만으로 갖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경우 남편은 마치 동물이나 짐승같이 생각된다는 것이다. 치료자는 그런 태도를 이해하고 받아줘야 한다고 역설했음에도 그녀는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의 돈독한 신앙이 육체의 본능을 이해하는 방해물이었다. 그 결과 남편은 아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교회에 봉사하는 것도 문제삼았다. 신앙인이라면 본능의 문제를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6. 결론: 목회자들도 상담치료 전문가가 되어야 지금까지 인터넷중독과 심리적 문제에 대해 다뤘다. 치료자는 성욕 결핍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수행되고 있는 병리학적 측면을 구분해야 한다. 어디까지 신앙이고 본능인지 정확히 구분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신앙인에게 영적 일과 세상적 일의 구분이 쉽지 않듯 인터넷중독자들도 본능의 이해가 어렵다. 이러한 상담치료는 클라인벨이 강조하는 목회심리 치료와 맥을 같이한다. 목회심리 치료는 클라인벨에 의하면 숨겨진 감정, 내면적 갈등, 억눌렸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들춰내고 치료해 내담자의 인격에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장기적 도움의 과정이다. 이는 중독자들 내면에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점을 정확히 간파해야 한다. 치료를 통해 인터넷중독자들은 자신들의 인격과 행동 유형에 기본적인 면모들을 더 건설적이고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상담치료는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그 장벽들은 전인건강을 추구하는 데 방해 요인이라는 점에서 상담치료가 상당히 심층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담치료가 심층적이어야 한다는 점은 내면 뿐만 아니라 치료 기간을 장기적으로 하는 것도 포함한다. 다만 힐트너(Seward Hiltner)가 지적한 대로 “장기적 상담이 목회자 사역의 한 부분이 될 수 없다”는 견해는 부득이한 경우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심층 상담은 간단하지 않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교회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강조된다. 치료자는 상담과 치료에 전문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제한해야 한다고 클라인벨은 주장한다. 목회자는 보다 전문 훈련을 받아 심리를 치료하는 고도의 치료기술을 습득하고, 인터넷중독자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